[데일리즈 이수진 교수]
나는 여행을 자주 가지 못했다. 매사에 정적이고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성격적인 측면 외에도 그다지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는 측면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주 어쩌다 가게 되는 여행길에선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던 기억은 생생하다.
한국은 첩첩이 산에다 굽이굽이 강줄기도 길어서 여행자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나는 여행지의 인상을 내내 간직하였다가 문득 도시를 떠나고 싶을 때 떠올리곤 하였다.
풍경 속에 있으면 나는 미립자에 불과했고, 풀, 꽃, 벌레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바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내가 죽으면 저 풍경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만 슬퍼졌고, 생명은 유한하다는 만고의 진리를 뼈저리게 느꼈다.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는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함이지만, 그 보다는 자신보다 먼저 지상을 밟고 떠나간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 죽음과 동화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나고 살다가 죽어가는 동안에 저리도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고, 남기고 싶은 것도 저리 많을까 하고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유적지, 주거지, 시장 등을 돌아다니며 나는 삶이란 분주한 것이고, 또 그 만큼 사연도 많음을 어렵사리 깨달았다. 밥공기 하나에서도 삶의 애틋함을 보고, 손 때 묻은 책 한 권에서도 삶에 매달리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을 느낄 수 있듯이, 유한성이 아름다운 것임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유한함을 인정하고 나면 일체가 편안해진다.
그렇다고 쉽게 허무에 빠지라는 말은 아니다. 삶을 누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누리라는 말이다. 그렇게 누리면서 살다가 떠날 때가 되었을 때 아쉬움에 몸을 떨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몇 명이나 이럴 수 있으랴. 나 역시도 마찬가지.
생각해 보면 인간의 오감은, 물론 다른 동물에게도 있는 것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무한한 정보를 흡수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정보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늘 보아오던 풍경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애청하던 음악을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것, 음식물을 다시는 맛볼 수 없다는 것, 언제나 만져보던 자신의 물건들을 다시는 만질 수 없다는 것, 그 뿐이다.
하지만 얼마나 아쉬운가! 나도 아쉬움에 몸을 떨며 한 순간이라도 더 숨을 쉬며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고 싶을 것이다.
꽤 오래전 어떤 책에서 한 여행자가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다닌 뒤 숙소로 돌아오니까 문득 자기가 지나친 풍경의 구석구석이 선명하게 보여서 그만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 여행자가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지만 막상 한 가지도 얻지 못하고 피곤을 느꼈을 때, 그 때 눈에 들어 온 사람의 세상살이가 실제로는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흔히 풍경은 보는 사람을 속인다. 여행하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그 인상을 잡아두려 해도 언제나 쉽게 빠져 나간다. 따라서 내가 시장을 돌아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해서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볼 때, 구석구석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고 그것이 마음속에 파장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세상살이는 고달프다. 아름다움 보다는 추함이 더 많고, 관용보다는 자만이 더 대접을 받는다. 소신껏 일을 해도 합당한 대가가 돌아오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타인을 의식하며 경쟁을 해야 한다.
따라서 여행을 떠난다 해도 사람의 고달픈 세상살이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이 지상에서 붙박이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에 겨운 일인지를 깨닫고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세상살이에 지쳐 활력을 얻고자 여행을 떠났다가 그만 더 고달픈 삶의 짐을 지고 돌아오는 셈이다.
하지만 여행은 자주 떠날수록 좋다. 많은 것을 얻어오려 하지만 않는다면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심호흡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분주하게 살면서 두껍게 쌓인 때를 훌훌 털고 다시 먼지 나는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할 때, 주저 없이 여행길에 올라라. 하지만 누군들 쉽게 여행을 떠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