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즈 이요한 기고, 정리 : 전은솔 기자]
일본에서 거주하는 재일교포 2세로부터 도착한 편지는 일본의 강제징용으로 고충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를 소개하며 징용에 대해 일본에서의 관심이 필요하고 보상 또는 역사문제에 대한 해결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관심있는 관계자나 같은 경험을 한 역사적 증인이 있지 않을까 해서 ‘데일리즈’는 공유하고자 기고를 전한다. <편집자 주>
최근 일본 제국주의시대의 강제징용에 대해 국내 사법 판결를 두고 일본 측이 거부의사를 나타낸 것에 대해 ‘역사를 부인하는 퇴행적인 대응’, ‘후안무치’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앞서 우리나라 대법원은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내렸다. 이에 고노 다로(河野太郎) 일본 외상은 한국 정부가 책임지고 강제징용 보상하라고 발언했다.
일각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노동자와 군인 등으로 강제동원 됐던 우리나라 국민은 103만2700여 명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많은 한국인들이 위안부로 끌려간 것 말고도 일본 전범기업에 강제로 징용당한 사실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 사실이 버젓이 증언되고 있음에 한일 양국의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 첫번째 메일
이런 와중에 ‘데일리즈’에 일본에서부터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일본 동경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이요한 씨는 “저의 아버지께서 현재 95세입니다.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의 센자끼(仙崎) 탄광에서, 그리고 일본 병사로 있다가 1945년 구사일생으로 한국에 돌아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씨는 1965년 일본으로 부터 배상금 받았다면 분명 기록이 있을 것이다. 당시 (아버지가) 휴대했던 군인수첩과 완장은 정체 모를 사람들이 와서 회수하는 댓가로 금전 몇 푼을 지불했다며 아버지는 그대로 갖고 있었으면 지금쯤 증거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이 씨에 따르면 아버지께서 한국으로 돌아오셨을 때 면인지 읍사무소(충청남도 청양)인지 아버지의 성함(이탄우, 李綻雨) 한자를 잘못 읽을 리가 없는데 한글 표기만 바꿔버려 지금도 바뀐(현재 이정우) 성함을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자 綻(탄)을 定(정)때문에 이정우라고 오기된 것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배상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아버지를 위해 받고 싶다며 사연을 전했다. 다음은 이 씨가 전한 이야기다.
일본 각 지역의 교단 목회자가 모이는데 시모노세키에서 목회하는 일본 목사와 같이 식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식사하는 테이블에서 옆에 앉은 분과 통성명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시모노세키에서 오신 모치츠끼라는 목회자였습니다.
대화 중에 저의 아버지로 부터 들었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모치츠키 목사님께 혹시 센자키라는 마을를 아시냐고 물어 봤는데 시모노세키에서 바다쪽으로 30~40분 가면 있다고 하셨고, 그럼 혹시 탄광이 있냐고도 물어 봤더니 예전에 있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센자끼는 저의 아버지한테 들은 마을인데 일제시대 아버지께서 1941년 만주로 강제 용병으로 징용되어 그 후 가게 된 곳이 시모노세끼의 센자끼 탄광소였는데 그곳에서 석탄을 캐는 작업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제, 오늘 있었던 일 처럼 되새기며 작업을 하다가 도중 과로로 죽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이러다가 나도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같이 강제 징용된 다른 두 명의 동료와 그곳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야밤에 감시원이 졸고 있는 기회를 타서 세 명이 죽자 살자 앞만 보며 달려 산기슭을 타고 내려가며 밤새 도주해 간 곳이 일본 군부대 막사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탈출에 앞서 들었던 정보로는 일단 (일본군부대)들어가면 자유롭게 출입을 할 수 없지만 하루 식사 세끼를 할 수 있고, 월급 30엔을 받을 수 있고, 군인수첩이 발급되면 휴가철에는 군복을 입고 일본 전국을 군인수첩을 보여주면 어디든 갈수 있다는 혜택이 있다는 이야기에 차라리 죽는 것 보다는 낫다고 판단하고 3명이 도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경험은 제가 일본에 오기 전에 한번도 말씀하지 아니하셨고 처음 이 내용을 들은 것도 어머니가 병원(의료사고)에서 전신마비가 되어 한국에 귀국해 있는 동안 처음 아버지로부터 3년 전에 들은 내용입니다. 이 때 아버지가 과거에 대해 왜 저에게 냉정하게 대했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3년전에 아버지께 강제 징용된 내용을 듣고 일본을 왕래하며 아버지가 기억하고 있는 지역이 정말 있는지..., 그래서 가끔 주위의 일본 사람들한테 물어 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던 와중에 사실이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토록 저를 대하는 모습이 냉정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 두번째 메일
회신 감사드리며 또한 방법을 알려 주시고 함께 협력해 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제가 올 9월 한국에 일주일 가서 부모님을 뵙고 아버지가 몸이 많이 불편해지셔서 좀 안타까웠습니다.
현재 두 분이 계시고 주말에는 누님 둘이 한 주씩 돌아가며 반찬 등을 만들어 돌보고 있고 평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5시까지 자치단체의 요양사가 와서 돌보고 있습니다.
지지난 달 뵐 때 아버지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지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끔 하시는 말씀이 빨리 눈을 감고 싶은데 왜 죽지 않고 이렇게 고생하는가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아직 해결되지 아니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큽니다.
마지막 제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국가가 아버지 같은 분들에게 제대로 못했던 즉 핑계대며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고 피해 본 분들께 배상하지 아니한 행위에 대한 한을 조금이나마 해결하여 위로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더욱 간절해 지더군요.
살아 계실 때 당시의 마음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보내주신 격려의 말씀에 감사드리며 아버지의 당시의 상황을 조금씩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그 당시의 회상을 3~4년전 어머니를 간병할때 한때 영상으로 녹음해 둔 것이 있는데 휴대폰에 좀 문제가 있어 현재 컴퓨터 안에 저장된 파일을 열수 없고, 아버지가 지금 정신이 확실 하실때 직접 인터뷰가 가능하면 한국에 귀국해서 빠른 조치를 취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귀국해서 상황이 진전될 것 같으면 빠른 시일에 한국에 귀국할 마음은 간절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2018년 11월 6일
일본 동경 아다치구에서 이요한 (연락처 : 81-070-4413-4512 / 이메일 : j3906009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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