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즈 신상인 기자]
이수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ㆍ문화학과 외래교수는 비록 전공은 영문학이지만 다방면에 관심과 노력이 돋보이는 은둔형(?) 독서 고수다. 아울러 그가 접하는 책은 영문학 뿐만아니라 미학(美學), 음악, 영화, 역사, 밀리터리까지 꽤 다양하다. 그의 서재 청향재(淸香齋)를 둘러 본 느낌은 '대단하다' 그 자체였다. 30여평 아파트 모든 방과 거실이 책과 음반, CD, 블루레이, 4K 등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초 아파트를 서재로 꾸민 그의 공간에서 차를 마시고, 지난 14일 서울 서대문구 안산 자락길을 함께 2시간 남짓 걸으면서 이수진 교수의 독서와 교양, 책을 읽는 방법 등 평소 주장하는 바를 들어봤다.
이 교수는 르네상스ㆍ셰익스피어와 근현대 영미희곡을 전공한 영문학 박사이다. 아울러 <데일리즈>에 [淸香齋 풍경과 일상 : 책 읽는 법], [교양인의 조건], [책으로 보는 日本], [이수진의 한국학], [이수진의 시사교양] 등의 글을 게재하고 있다.

- 평소 독서와 교양, 인문학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시는데 세 단어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왜 책을 읽어야 하고 인간성에 대해 사유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인문학이 무엇을 지양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군요. 음, 그것은 책이야말로, 독서 행위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최대ㆍ최후의 성소(聖所)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책을 쓰는 사람은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확대하고 그것으로 세계와의 소통 내지 화해를 바라며,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쓴 사람의 정신과 자신의 정신과의 접점에서 인간(성)과 세계의 원리를 똑바로 보는 시각을 형성하고 비판적인 행동을 하는데 뒷받침을 단단히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과 정신적 교류를 통해 일상의 온갖 잡사(雜事)와 욕망의 충돌, 시비(是非)의 물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나와 대화할 수 있고,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지금보다 더 정신적이고 도덕적으로 진일보한 삶을 위한 충전의 요람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진정한 교양은 그렇게 형성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인문학은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옛 선비들이 실천했듯 매일 수신서와 역사서를 읽으며 자신을 성찰하고 그렇게 깊어진 내면의 눈으로 자신과 세계를 제대로 보는 힘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전공은 르네상스와 셰익스피어, 근ㆍ현대 희곡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셰익스피어와 가장 비슷한 인물은 누구라고 보십니까, 그리고 우리나라에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르네상스가 올 수 있습니까.
"첫째, 우리 역사에서 셰익스피어와 가장 비슷한 인물이라면, 물론 일대일 대응은 할 수 없지만, 역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아닐까 합니다.(다산 선생에 대한 항목에서 자세히 답하겠습니다)
둘째, '21세기 새로운 르네상스가 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탁월한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본명은 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 1445~1510)가 그린 '팔라스와 켄타우로스(Pallas and the Centaur, 1482)'라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하고 답하겠습니다.

팔라스(Pallas)는 아테나(Athena), 즉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이고 켄타우로스(Centaur)는 반인반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일종의 괴물이지요. 아테나의 머리카락부터 옷에 이르기까지 덮여 있는 것은 아테나가 만들어낸 올리브 나무의 가지이고, 왼손에는 전쟁의 여신임을 상징하는 미늘창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보티첼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알다시피 켄타우로스는 그 모습에서 추정할 수 있듯 인간의 두 가지 본성, 즉 야만성과 이성을 나타내는데, 이 그림에서는 아테나가 켄타우로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동작을 통해 아테나로 상징되는 지혜와 문명의 빛이 켄타우로스로 상징되는 야만성을 들추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켄타우로스는 부끄러워하듯 뒷걸음질 치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지요.(『세계명화비밀 2-신화 상징』, 생각의 나무, 2007, p.48 참고)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 바로 여깁니다. 지혜로써 야만을 다스리고 무지를 깨닫게 하여 참다운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것. 나라 안팎으로 소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우위만을 주장하는 지혜롭지 못한 소수 한국인들에게 지금으로부터 536년 전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은 말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너의 무지를 깨닫고 이해하려 노력하며 깊이 반성하라'고요.
앞서 즉답을 미루어둔 '21세기 새로운 르네상스가 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엔 '가능하다'고 답하겠습니다. 알다시피 르네상스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바로 알고자 했던 인간 중심의 운동이었지요. 따라서 21세기 최첨단 과학시대인 지금, 오히려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가는 현대인들에게 르네상스 정신을 되살리는 일이 어쩌면 과학기술로 인해 인간의 정서마저도 획일화 되어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적응부정과 또한 갈수록 돈과 권력의 횡포로 인해 인간 개개인에 대한 가치가 희박해져가는 현실에서, 인간으로써의 가능성과 마음의 힘을 믿고 육체와 정신의 조화에 매진하는 개인들이 존재하는 한, 비록 다른 형태와 내용이라 할지라도 르네상스가 추구했던 인간으로서의 가치 회복은 충분히 기대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군요, 그러니까 정약용 선생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군요.
"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은 제 30대부터 지금까지 저를 지탱해주고 살아갈 힘을 주는 제가 가장 존경하고 늘 사숙(私淑)하는 인물입니다. 누구나 잘 알고 계시겠지만 다산 선생이야말로 한국의 긴 역사가 배출한 많은 인걸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실학자이자 수원 화성을 설계한 건축가, 기중가를 발명한 토목공학자이고,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힘이 되고자 평생을 바친 행정가이자 경전을 연구하고 해제한 탁월한 경학자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수양에 힘쓰는 한 편 시를 쓰면서 감정을 토로한 감성적 시인이었고, 자식들에게는 귀양지에서 편지로 학문에 매진하기를 당부했던 엄격한 아버지이자, 500권이 넘는 다종다양한 책을 남긴 위대한 저술가이기도 하지요. 그야말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르네상스 맨이라 할 수 있지요.
선생의 책 속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거의 모든 양상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그 극복 방법에 대해 한 편 이상의 글들이 들어 있어, 어떻게 보면 선생 이외의 다른 사람의 글은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주제의 다양함이나 분량의 방대함, 그리고 깊이에서 거개의 인물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거대한 인물인 다산 선생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심성과 자기 수양, 마음을 경계하고 절제하는데 도움을 주는 이 땅이 낳은 진정 위대한 어른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선생에 대한 제 관심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선생의 사상을 깊이 알고 이해하려 애쓰며 매일의 성찰과 수신을 위해 항상 읽고 사색하는 삶의 주체로써의 의미를 지닙니다."
히틀러의 권력 시스템...인류의 정신과 육체에 폭압적으로 작용하는 권력은 곧 부패

- 서가를 보면 다양한 주제의 책들이 많습니다. 그 중 '히틀러'에 관한 책들도 꽤 보입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먼저 제바스티안 하프너라는 필명으로, 나치의 폭정을 피해 영국으로 이민한 후 저술활동을 시작했던 독일인 라이문트 프레첼(Raimund Pretzel, 1907~1990)의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돌베개, 2014)에서 인용을 한 후 답변을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분명히 히틀러의 작품이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독일과 유럽의 분할이 없었을 것이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미국과 소련이 베를린에 주둔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없었을 것이고, 히틀러가 없었다면 식민지 해방도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토록 빠른 해방은 아니었을 것이고, 또한 아시아ㆍ아랍ㆍ아프리카의 해방과 유럽의 추락도 없었을 것이다(p.166~7)'
제가 히틀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대학시절 읽었던 『아우슈비츠는 불타는가?』(종로서적, 1985)를 통해 촉발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일했던 필립 뮐러라는 생존자가 쓴 책으로, 잔혹하고도 반인륜적인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기록한 증언록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눈뜨게 되었고 그 뒤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관련서 들을 읽고 모아 왔습니다. 특히 직장 생활을 하는 틈틈이 홍사중 선생의 『히틀러』(한길사, 1997)를 읽으며 소위 ‘히틀러 현상’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히틀러일까요? 아니,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과연 히틀러는 과거의 유물일 뿐일까요? 앞서 인용한 부분으로도 알 수 있듯, 저는 히틀러가 현재진행형의 인물이고, 따라서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의 어느 한 쪽 구석에서는 히틀러의 생각과 행동을 모방하여 자국민을 억압하거나 타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자칭 타칭 '위대한 지도자'가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봅니다.
작금의 일본의 극우경화와 아베 정권의 집단적 자위권 날치기 통과(2015. 9.19), 그리고 과거사 부정 등의 치밀하게 계획된 정치적 행동 뒤에서, 또는 북한의 3대에 걸친 세습권력과 핵 보유를 위한 김정은의 정치적 제스처 뒤에서 저는 히틀러의 망령을 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아시아ㆍ아프리카ㆍ중동ㆍ남미 각국 정치 지도자들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 뒤에도 히틀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요.
이렇게 자국민을 오도하고 타국에 대한 적개심을 통치 권력의 핵심으로 이용하려는 야심, 자국 내부의 취약계층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하여 권력을 강화하고 영구화하려는 속셈, 어떤 명분을 조작해서라도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극히 위험한 사고체계를 가진 사이코패스 지도자와 그 아래에서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자 하는 소수 정치 모리배들의 이익이 부합하는 순간, 국가의 자국민 희생 시스템이 작동하여 스스로의 의지로 굴러가는 전쟁기계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히틀러 현상이 고개를 드는 지점이 바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비록 전체는 아니라 해도 독일 국민 대다수가 독재자 히틀러에게 동조했고 유대인 600만 학살을 방조했으며 그 결과 인류의 전체 양심과 이성적 합리성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지요.
현대 한국이라고 다를까요? 여전한 지역 이기주의와 선거 때마다 불쑥 나타나 자신을 찍어 달라고 선동하는 후보자들 중에서 국민들은 어떤 기준과 소신으로 투표하고 있나요? 정치적 권력과 거리를 두고 사는 일반 소시민으로써, 정작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고 그 권력 시스템이 어떻게 나의 정신과 육체에 폭압적으로 작용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히틀러가 위험한 지점이 바로 여기 입니다. 권력은 곧 부패한다는 것.
따라서 권력 유지를 위해서 자국민의 희생쯤은 가볍게 여기는 정치 지도자의 사탕발림에 기만당하지 않을 지성은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입과 혀로 빚어내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무조건 열광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이성적이고 분석적으로 차분히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정신과 육체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체제와 독재자의 정치적 야심이 맞물리는 그 지점에서 나라는 개인성을 여하히 유지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지성을 갖추고 있나요? 따라서 히틀러는 과거의 현상이 아니라 현재도 내 옆에서 엄연히 살아가고 있는 악의 의지임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독재자와 독재체제는 백성과 시스템과의 공모임을 똑바로 깨닫길 바랍니다."

이 교수의 서가는 전공인 영문학 이외에도 한국학, 지역학, 군사학, 역사학, 철학사상, 미술, 음악, 중국 고전 등 일만여 권의 책들로 구성돼 있다.
또한 다양한 도서 말고도 음반(카세트 테이프, CD, LP)과 영화(DVD, 블루레이, 4K)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고 있어 그 박학다식(博學多識)을 가늠할 수 있다.
- 평소 독서의 주제를 삼는 기준이나, 책을 읽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네, 제 나름의 기준과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먼저 인용을 하고 답하겠습니다.
'선비가 한가로이 지내며 이렇다 할 일도 없을 때 책을 읽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책을 읽지 않는다면, 작게는 정신없이 잠자거나 바둑 혹은 장기를 두게 되고, 크게는 남을 비방하거나 돈벌이와 여색에 힘쓰게 된다. 아아, 그러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책을 읽을 수밖에.(p.49~50)'
위 글은 청장관 이덕무(靑莊館 李德懋, 1741~1793) 선생의 글을 모은 『책에 미친 바보』(미다스북스, 2004) 중 '내가 책을 읽는 이유'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사람마다 책을 읽어야 하는 당위성이나 독서에 대해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겠지만,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의미하는 밑바탕에는 결국 자기 수행 또는 자기 계몽이라는 실천적 목적이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겠지요.
이덕무 선생은 조선의 선비들 중에서도 방대한 독서량과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대표적 독서인입니다. 선생의 삶은 태반이 경서와 제자백가, 고금의 역사와 문물제도, 음운학, 문자학, 역대문집, 농서와 의서 등에 이르는 다방면의 독서로 형성되었다고 하지요. 선생은 책읽기를 통해 얻은 지식과 지혜로 자신의 삶을 도덕적이고 경건하게 유지해 나갔고 인간적 고뇌로부터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며 최소한도로 소박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혹자는 경제 활동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독서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이덕무 선생이 살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선비라는 신분이 지니고 있던 사회적 역할이 생산 활동과는 거리가 있었고 오직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에 한정되어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선비의 독서행위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일종의 정신적 방법론을 제시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에 따라 독서행위와 생산 활동을 같은 반열에 두었던 사회적 분위기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선생은 많은 글에서 독서의 당위성 내지 독서의 취지 또는 독서 방법 등을 수시로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에게 독서는 배가 고플 때도, 추울 때도, 마음이 괴로울 때도, 병에 걸렸을 때도 결코 그만둘 수 없었던 그 자체 생존의 이유였던 것이지요.
제가 책을 선택하고 읽는 기준도 이덕무 선생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관심 분야도 넓고 매일 읽는 책의 권수도 그만큼 많은 편입니다. 이덕무 선생처럼 저도 가능한 많은 분야의 책들을 읽어 사물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뿐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 그 순환원리에서 나의 육체적, 정신적 삶을 통제하고 절제하며 전면적인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관심 분야의 책을 펴고 차분하게 한 장씩 읽어나가는 실천을 통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독서만큼 생산적인 행위가 또 있을까요? 덧붙여 관심 분야가 많으면 많을수록 외부의 흐름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요즘처럼 대립과 반목이 격심한 시절일수록 관심 분야의 명저들을 읽으며 속세의 잡음들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그리고 자기수양에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삶은 그 자체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뿐인 삶을 좀 더 주체적이고 의미 깊게 살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동서고금의 명저들을 읽고 자신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길 바랍니다."
한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예(禮) 실천만한 것이 없다

- 인문학적으로 최근 다문화ㆍ난민 문제, 워마드 인식 논란, 퀴어 축제로 본 성(性) 정체성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다문화는 인간이라는 동종으로써의 본질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 한국이 가난하던 시절,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로 직업을 구하고자 또는 결혼이나 입양 등의 형태로 많은 한국인들이 고국을 떠났습니다. 낯선 외국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스산한 삶을 이어갔을 한국인들의 모습과 지금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과 난민들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일자리를 찾아, 결혼을 통해 다문화 가정을 꾸리고자, 또는 한국 문화가 좋아 무작정 들어온 외국인들도 많겠지요. 그만큼 언론을 통해 듣고 보게 되는 사례들도 많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들은 이미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실정이지요.
그런데 참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제주도에 들어 온 예멘 난민들의 경우는 지역경제와 치안 등의 문제와 겹쳐 한국 사회에 암운을 드리울 수도 있고, 갈등과 반목을 불러와 폭력이나 배제 등의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요. 과거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히틀러가 득세했듯, 내가 아닌 타자에 대한 증오는 권력과 언론에 의해 조작되고 호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부정적 인식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워마드도 그 본질은 상대에 대한 몰이해와 어떤 계기로 인해 중첩된 내면의 분노가 쏟아 내는 감정 표출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소통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에서 분열과 폭력적인 분쟁을 조장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하는 극단적인 사고라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퀴어 축제도 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떤 사회가 소수의 성향과 의견을 무시하고 다수의 성향과 의견만을 수용한다면 그 사회는 결코 건강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문학은 모든 인간을 동등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같은 감정과 지성을 지닌 동일한 존재로써의 동류애(同流愛)를 지니고 이해와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힘이 바로 인문학인 것이지요.
- 인문학이 왜 중요한 겁니까. 그만큼 한국 사회가 문제가 있는 것인가요.
"이 질문에도 다산 선생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령 우리가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며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다가 죽는다고 하자. 죽는 날 사람과 뼈가 함께 썩고, 한 상자의 책도 전하는 바가 없다면 삶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이런 것을 삶이라고 한다면 금수와 다를 것이 없다. 세상에 으뜸가는 경박한 남자가 있으니,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일을 '한가한 일'이라 하고,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옛날이야기'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맹자는 말했다. '대체(大體)를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고, 서체(小體)를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된다'고. 저가 소인됨을 달게 여기니 난들 장차 어찌하겠는가?(『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 p.38)'
다산 선생의 삶에 대한 인문적 사색과 성찰은 여러 책들과 편지 속에 수도 없이 들어 있습니다. 속세의 인간들이 가치를 부여하며 가까이 하고자 기를 쓰고 달려드는 권력이나 재물, 명예나 지위 등은 다산 선생이 보기에 소인배들의 아귀다툼일 뿐이지요. 따라서 현대의 한국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여러 가치들도 다산 선생이라면 기꺼이 멀리 하고 가능한 그 아수라(阿修羅)에서 빨리 물러 나와 삶 그 자체가 주는 기쁨을 향유하고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을 훨씬 바람직한 일로 여길 것입니다.
현재의 한국 사회가 어떻다고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비정상적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데일리즈에 올라오는 기사 제목만 훑어보아도 현 한국 사회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며, 계층·계급간 대립과 갈등, 노사문제, 정치적 불균형, 경제적 불평등에다 최근의 남녀 혐오 및 극한 대립에 이르기 까지, 산적되어 있는 국내 문제와 그에 비해 해결이 요원한 상황을 고려할 때, 현재 한국은 어쩌면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국외 문제로 북한과의 관계라든지 중국과 미국의 기 싸움에서 한국이 얼마나 자주적으로 대처할 능력이 있는 지도 의문이고, 일본과의 관계 또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현 상황도 밝지만은 않습니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산업자본(가)의 가공할 힘이 개인의 목을 죄고 노동의 신성함을 모독하며 물질과 부동산, 돈만이 최고라고 외쳐대고 있는 이 때,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펴고자 하다 역적으로 몰려 강제 유배되었어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에 천착(穿鑿)하여 삶의 불안을 역동성으로 바꾸어 정신의 승리자가 되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을 떠올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인문학은 사실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있는 힘, 그것을 통해 자신이 속해 살아가고 있는 시공간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인간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삶의 방식인지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출발이자 결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선생이 유배지의 빈한한 초가에서 조그만 책상 앞에 앉아 희미한 등 아래 책을 펴고 자신의 삶을 추스리면서 인생사 전반에 걸친 도덕적 사색과 윤리적 성찰을 거듭하던 실천적 모습이 인문학이 아니면 무엇이 인문학일까요?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평생고용의 신화가 무너진 지 오래인 지금, 하루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에, 사방이 모두 나를 에워싸고 막아서며 내 뜻을 꺾으려 했어도 좌절을 딛고 우뚝 서서 오히려 불멸의 업적을 쌓아 올린 다산 선생의 삶을 조금이라도 따르려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인생을 합리적으로 경영하며 충실하게 살거나 대충 무계획적으로 살거나 모두 개인의 선택이겠지만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이 앞으로도 제 삶의 모토가 될 것입니다."

- 추가로 제시하거나 주장하시는 바, 또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네, 역시 고전에서 한 대목 뽑아 보았습니다. 『논어(論語)』의「안연편(顔淵編)」입니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人.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人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唉.'
워낙 자주 인용되는 부분이지만 그 내용을 따라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실감을 하곤 합니다.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연이 어짊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을 이겨내고 예(禮)를 되찾는 것이 어짊을 도모하는 것이다. 어느 하루 자신을 이겨내고 예(禮)를 되찾는다면 천하가 어짊에 돌아올 것이다. 어짊을 도모하는 것이 자기에게서 비롯되지 남에게서 비롯되겠느냐? 안연이 말했다. 세목을 묻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禮)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아라.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나 그 말씀을 잘 받들겠습니다'(『새 번역 논어』, 생각의 나무, 1999, p.312)
고교시절엔 한문시간에, 대학시절엔 '교양한문'을 통해 지겹도록 듣고 또 들었던 구절입니다. 그런데, 50대 초반을 넘긴 지금, 새삼 이 구절이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예(禮)로써 대했던가? 나는 나를 진정 극복하고 예를 되찾았는가? 예(禮)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부를 얼마나 깊이 했던가? 이러한 질문들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비록 노력은 했어도, 그동안 예(禮)를 다하지 못하고 살아 왔다는 반증이겠지요.
반면 우리 옛 선비들의 예(禮)에 대한 마음가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지금 한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의 예(禮)에 관한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 부분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현재 한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는 성폭행, 살인, 사기사건, 또는 부자들의 탈세나 자산의 해외도피, 재벌의 갑질논란, 정치인들의 비도덕적인 뇌물수수나 거짓말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부정적 목록들의 근본적 해결에 예(禮)라는 한 글자가 하나의 긍정적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자신에 대한 예(禮)는 타인에 대한 예(禮)로 이어지는 것이고, 자신을 예(禮)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예(禮)로 대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선 자신을 극복하고 예(禮)를 되찾는 것이 인(仁)의 근본이라는 공자 말씀을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곧 수시로 고개를 쳐드는 욕망의 절제와 삿된 욕심의 억제, 그를 통한 도덕성의 회복과 윤리적 행동의 실천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옛 선비들은 발걸음 하나, 손짓 하나, 눈동자의 위치 또는 음색, 의복 등에 이르기까지, 육체의 정갈함과 정신적 단정함에 온 힘을 기울였지요. 그러니까 선비의 하루는 곧 예(禮)를 실천하고, 예로 타인을 대하며, 예(禮)를 통해 학문과 독서에 힘쓰는 생활이었다는 뜻입니다.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정신적 절제에서 흐트러짐 없는 육체가 가능한 것이니,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타인도 귀한 존재라는 당연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참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욱 지키기가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는 네 가지 실천 사항만 제대로 지켜진다면 위에서 말한 우리 사회의 갖가지 병리현상들도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병리현상 자체가 생겨나지도 않을 것이고 그야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저절로 조성되겠지요.
옛것이라고 해서 현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기술과 물질이 조금 부족했어도 오히려 도덕적으로 살고자 노력했고, 모든 것이 궁핍한 상황에서 절제하며 살려고 분투했던 선비들을 생각해보면 지금이야말로 예의 정신을 살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약용이 말하길..."한 상자의 책도 전하는 바가 없다면 삶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 마지막으로 올 여름 휴가 기간 청년들이나 직장인들이 소프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나 영화를 추천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책과 영화를 추천한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십인십색이라는 말도 있듯, 성격과 개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 들어맞는 책과 영화가 있다면 그것은 획일적이라는 말이 아직도 통용된다는 뜻이겠지요.
따라서 먼저 책을 추천해야 하는 자리에서 저는 나름의 기준으로 제시하곤 합니다. 우선 제가 먼저 읽고 제 삶에 어느 형태로든 영향을 미쳐 온 책들로 한정됩니다. 그것은 고전과 수신서와 역사서입니다. 물론 저도 추리소설이나 SF, 또는 만화나 음악 등, 몹시 흥미로운 주제의 책들도 읽어 왔고 지금도 가끔씩 읽습니다만, 지금의 저를 형성한 책들의 태반은 고전과 수신서, 역사서들이었습니다. 고전이라고 해서 무겁고 어려운 책들이 아닙니다. 『채근담(菜根談)』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 『논어』, 또는 『목민심서(牧民心書)』나 『연암집(燕巖集)』등은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삶의 지혜를 주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인간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시간을 내어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나가면 언젠가는 고전에 눈 뜰 때가 반드시 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개성을 똑바로 알고 어떤 책을 선택해 읽더라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한 권의 책밖에 읽을 시간이 없다면 어떤 책을 읽는 것이 내 삶에 방향성을 주고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의 선택에 무게를 두라는 것입니다.
영화는 더욱 추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제 취향에 맞는다고 타인에게도 반드시 맞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타인의 취향'이라는 영화도 있듯, 영화는 몹시 취향을 타는 예술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영화 추천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삶에 진지한 화두를 던져주는 예술 영화부터 대중적인 영화들까지 두루 좋아하고 시청합니다."
대화 말미에 이수진 교수는 요즘 인문학 강의에 대한 관심도 나타냈다. 이 교수는 그가 일하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지난 2009년부터 '북미사회와 문화와 영연방사회와 문화', '세계의 축제와 여가문화', '글로벌 축제문화' 등 영문학 이외의 인문학 강의하고 있다.
아울러 지난 2015년 서울 남강고등학교에서 '인문학 특강', 지난 7월에는 서울 아현초등학교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위한 인문학 특강'을 강의했다.
독서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네요. 다양한 분야에 대한 글도 기대해봅니다